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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2





이재명 대통령의 『환단고기』 관련 발언을 두고 국민의힘과 개혁신당 등 보수 야당과 일부에서 이 대통령이 '위서'인 『환단고기』를 '신봉'한다는 식으로 비난을 하고 있다. 과연 정말 『환단고기』는 강단사학계 측의 주장대로 위서가 맞는지 검증을 위해 이번 기사를 기획했다.<편집자 주>
지난 기사에서 『환단고기』위서론자들이 그 책을 두고 위서라고 주장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였던 '근대 어휘' 관련 부분은 사실 '근대 어휘'가 아니라 이미 우리나라와 중국 고전에 숱하게 등장했던 단어들이었음이 확인됐다. 그들이 주장한 '일본식 한자어' 역시 중국 경전이나 불경에서 조어된 것, 또는 이에 유추된 어휘들이었다.
이어 『환단고기』위서론자들은 해당 책에 '후대의 지명'이 기록된 점과 『환단고기』속 내용에 대해 문제를 삼으며 위서라고 주장했는데 이번에는 그 주장이 얼마나 충실한 근거를 갖추고 있는지 검증하고자 한다.
영고탑은 정말 청나라 때 쓰인 지명인가?
위서론자 중 대표적인 인물인 조인성 교수는 자신의 논문 〈재야 사서 위서론 - 단기고사·환단고기·규원사화를 중심으로〉에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 《북부여기》, 《태백일사》에서 영고탑(寧古塔)이란 지명이 나오는 것을 문제 삼았다.
그는
"위에 나오는 영고탑은 청나라 시조 전설과 관련하여 생긴 지명이다. 따라서 영고탑이라는 지명은 청나라 성립 이전에 사용될 수 없는 것이다"
고 주장하며 청나라 이전에 쓰였다는 위 3종류의 책에서 '영고탑'이란 지명이 나왔으므로 위서라고 주장했다.
이도학 교수 또한 『만주원류고』의 한 가지 기록을 근거로 ‘영고탑’이라는 지명이 쓰인 것이 『환단고기』가 위서임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단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한 가지 사료만을 가지고 어떻게 그렇게 섣불리 단정 지을 수 있을까?
제주대학교 안창범 명예교수는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 나오는 영고탑에 대한 기록을 들어 이도학과 조인성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였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에서는 영고탑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만주어로 ‘여섯’은 영고라 하고 ‘자리’는 특(特)이라 한다. 영고탑은 본래 영고특(寧古特)에서 영고태(寧古台)로 영고태에서 영고탑으로 와전된 것이며 구설(舊說)로서 지명이 아니다.”
그러므로 안창범 교수는 영고탑은 지명이 아니라 본래 ‘영고의 옛 탑’이라는 뜻이며 단군조선 때부터 있었던 건물 모양의 탑이라고 주장했다. 건축물이 지명이 된 사례는 종종 발견할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로 서울 강남구의 압구정(鴨鷗亭)을 들 수 있다. 압구정은 본래 조선 세조 때 권신(權臣)이었던 한명회가 한강 변에 세웠던 정자 이름이지만 현재는 그 정자는 사라지고 없고 그것이 있던 곳이 지명이 됐다.
이희승의 『국어대사전』에는 영고탑이 ‘영안(寧安)’이라 하고 영안은 ‘역사적 고성(古城)’이라 했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영고탑은 ‘오라(烏剌), 애호(艾滸)와 함께 동삼성(東三省)의 하나’라고 하고 ‘성이 높고 해자가 깊다’고 했다. 이로 볼 때 영고탑 역시 본래 그 이름의 탑이 있던 곳이었는데 시간이 흘러 탑은 없어지고 대신 지명으로 굳어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만일 영고탑이란 지명이 청나라 이전에 쓰였다는 사실이 입증된 문헌이 나오면 이도학, 조인성 두 교수들의 주장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만주원류고』에는 『명실록(明實綠)』을 인용해
“명대 초기에 여진족이 이곳에 정착하여 이곳을 동해와집영고탑로(東海窩集寧古塔路)라고 불렀다.”
고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는 1368년에 건국된 나라이고 명대 초기는 우리 역사 상 고려 말에 해당하는데 《단군세기》를 지은 이암 역시 고려 말기 인물이며 《북부여기》를 쓴 범장 역시 고려 말기 인물이라 한다. 《태백일사》를 지은 이맥은 조선 중종 때 사람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들이 각 책들을 쓸 당시엔 이미 영고탑이란 지명이 우리나라에 알려졌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영고탑이란 지명이 무조건 청나라 때 처음으로 쓰인 지명이라고 보긴 어려워 보인다.

'상춘'이 청나라 때 쓰인 지명?
이어 조인성 교수는 앞서 언급한 논문에서 『환단고기』의 《단군세기》와《태백일사》에서 '상춘(常春)'이란 지명이 쓰인 것을 두고
"주가성자(朱家城子)가 있는 곳은 상춘이 아니라 장춘(長春)이다. 따라서 상춘은 장춘의 오사(誤寫)일 것이다. 그런데 장춘이라는 지명은 청 가경(嘉慶) 연간(1796~1820)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며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상춘은 장춘의 오사'라는 조인성 교수의 주장은 전혀 합리적인 근거가 없다. 잘못된 전제를 세워놓고 하위 논리를 구사하는 논법은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논증이라 볼 수 없는 것이다.
만일 『환단고기』에 '장춘'이란 지명이 나왔다면 조 교수의 말이 그런대로 근거는 있을지 모르지만 '장춘'이 아니라 '상춘'이라 쓰였는데 저런 식의 논증을 한다는 것은 요즘 말로 '억까(억지로 깐다는 뜻의 신조어)'에 불과한 것이다. 본래 상춘이었던 지명이 청나라 가경제 때 들어 현 지명인 '장춘'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을 덮어둔 채 일방적인 우기기에 불과하다.
『환단고기』 속 연개소문 가계도가 천남생묘지명을 베낀 것?
이어 조인성 교수는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 적힌 연개소문(淵蓋蘇文)의 가계도를 들어 해당 책이 1923년 이후에 쓰인 위서라고 주장했다. 해당 기록엔 연개소문의 아버지 이름이 연태조(淵太祖), 할아버지 이름이 연자유(淵子遊)라 기록돼 있는데 이 사실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천남생(泉男生)묘지명이 발견되면서 알려진 사실이란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1923년 천남생묘지명 발견 이후에야 알려진 사실이 조선 중종 때 기록이라는 《태백일사》에 기록돼 있으므로 『환단고기』는 1923년 이후에 저술된 위서라는 게 조인성 교수의 주장이다.

얼핏 봐선 그럴 듯하지만 조 교수의 주장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했다.
바로 『환단고기』《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에는 천남생묘지명에는 등장하지 않는 연개소문의 증조할아버지 연광(淵廣)의 이름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연개소문의 부친인 연태조와 조부 연자유의 이름은 천남생묘지명을 보고 알아냈다고 해도 증조부 연광의 이름은 그걸로 도무지 알아낼 방법이 없다.
그럼 위서론자들이 실질적인 『환단고기』의 저자라고 주장하는 한암당 이유립이 연광의 이름을 창작해냈을까? 아직 연개소문의 묘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미래에 혹시라도 연개소문의 묘가 발견된다면 너무도 쉽게 드러날 거짓말이다. 다시 말해, 이것은 저자가 천남생묘지명을 보고 적은 것이 아니라 연개소문의 가계가 기록된 책을 보고 기록했음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태백일사》엔 연개소문의 가계가 기록된 자료의 출처는 분명히 『조대기』라고 밝혀 놓았다. 이 『조대기』란 책은 발해 유민들이 편찬한 역사서라고 하는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조인성 교수는 『조대기』의 내용을 빌려왔다고는 하지만 그 내용에 근대에서야 비로소 사용된 용어들이 등장한다는 이유로 이 또한 위서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가 말한 '근대 용어'란 앞선 기사에서 봤듯이 사실 이미 옛날부터 우리나라와 중국 고전, 불경 등에서 쓰였던 어휘들이었다. 또한 『조대기』란 책이 지금은 전하지 않지만 실제로 옛날에 있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세조 때 내려진 사서 수거령에 이 책이 수거 대상 사서로 올라와 있기 때문이다.
《태백일사》발문엔 저자 이맥이 자신이 찬수관이었던 시절에 궁중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사서를 볼 수 있게 되어 그 책들을 참고해 《태백일사》를 지었다고 분명히 적어놓았다.
즉, 세조 때 수거되어 궁중에 비치되어 있는 『조대기』를 중종 때 찬수관을 지낸 이맥이 보게 되었고 그를 통해 연개소문의 가계를 알게 되었다고 보는 편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그것이 천남생묘지명을 통해 일부가 사실로 확인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있는 그대로 보기만 하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고구려 장수왕의 건흥 연호
『환단고기』《태백일사》에는 고구려 20대 태왕 장수왕(長壽王)의 연호를 건흥(建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1915년 충북 충주 노온면에서 출토된 불상의 광배명(光背名)에 ‘건흥 5년 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 발견됐다. 한때 백제 불상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감정 결과 고구려 불상으로 밝혀졌고 고구려에서 건흥이란 연호를 사용했던 게 사실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 인터넷에서 '초록불'이란 닉네임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학과 출신 소설가 이문영 씨는 『환단고기』가 사실상 1979년에 쓰인 책이므로 이러한 것들은 아무런 증거가 못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이유립이 1979년에 『환단고기』를 창작했다는 대전제에 사로잡혀 나온 발언일 뿐이다.
역사 기록의 사실 여부는 후대에 출토된 유물로 입증되는 경우가 많다. 이 역시 『환단고기』의 기록이 유물을 통해 사실로 입증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 이 책이 1915년 이후에 저술되었다는 걸 알려주지 못한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백제 25대 왕인 무령왕(武寧王)이 휘가 사마(斯摩)이고 501년에 즉위하여 523년 5월에 승하했다고 적혀 있는데 1971년에 충남 공주에서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에 같은 내용이 적혀 있다. 만약 이문영 씨의 논리대로라면 『삼국사기』역시 1971년 이후에 저술된 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보는 게 더 모순이 아닌가?

고려시대엔 무령왕릉이 발굴되지도 않았고 심지어 어디에 있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 증거로 『삼국사기』에는 무령왕의 장지가 어디인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1971년에 발굴된 무령왕릉의 지석엔 『삼국사기』의 기록과 동일하게 501년에 즉위하여 523년 5월에 승하했다고 적혀 있다.
이것은 『삼국사기』가 무령왕릉의 지석을 보고 적은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내려오던 기록을 보고 무령왕릉의 즉위, 승하 연대와 월을 적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환단고기』역시 고구려의 연호가 적혀 있는 옛 기록을 인용하여 건흥이란 연호를 적은 것이라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오히려 1915년에 발굴된 불상을 보고 적었다는 논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비논리적이다. 앞에서 연개소문의 가계에 관한 문제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바이다.
특히 『환단고기』엔 고구려에서 평락(平樂), 융무(隆武), 영락(永樂), 건흥(建興), 명치(明治), 대덕(大德), 홍무(弘武), 개화(開花) 등의 연호가 쓰였다고 기록돼 있는데 이 중 유물로 확인된 영락과 건흥을 제외한 나머지 연호들이 모두 창작된 것이라면 고구려 유물이 출토될 경우 금방 드러날 거짓말이 된다. 따라서 이것들을 모두 창작이라 보는 것이 오히려 비논리적이다.
발해 연호 문제
앞서 언급한 소설가 이문영 씨는 발해의 연호들이 모두 『신당서』에 그대로 적혀 있으므로 『환단고기』에서 발해의 연호들이 기록된 것을 가지고 위서가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 역시도 얼핏 봐서는 그럴 듯하게 들리지만 그의 주장에는 중대한 결함이 있다.
바로 『신당서』에는 모든 발해 황제들의 연호가 다 기록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신당서』에 기록된 발해의 연호는 2대 무왕(武王)의 연호인 인안(仁安)부터 11대 대이진(大彛震)의 연호인 함화(咸和)까지만 나와 있을 뿐 그 이후 황제들의 연호는 알 수가 없다.
반면 『환단고기』엔 발해가 『신당서』에 기록된 연호들 외에 중광(重光), 천통(天統), 대정(大定), 천복(天福), 청태(淸泰) 등이 더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나마 천통은 협계 태 씨 족보를 통해 알았다고 쳐도 나머지 연호들은 『신당서』나 『발해고』를 통해서는 절대 알 수 없는 사실들이다. 그럼 이것들도 모두 창작일까?
혹시라도 발해인들이 직접 기록한 역사서가 발견된다거나 발해인들의 유물이 추가로 발견되면 너무도 쉽게 드러날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상의 발해 연호들은 『신당서』나 『발해고』를 보고 적은 것이 아니라 《태백일사》에서 직접 밝힌 대로 『조대기』를 통해 보고 적었다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일 것이다.
결론
이상의 사실들로 볼 때 '후대 지명'이 들어갔기 때문에 위서라는 주장이나 20세기에 발견된 사실이 수록돼 있으므로 위서라는 주장 역시도 근대 어휘 사용 문제와 마찬가지로 모두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근거를 갖고 논증했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처음부터 "이 책은 위서다"고 단정을 지은 상태에서 논증을 하려 든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부실해 보인다.
설령 후대 지명이나 근대 용어 등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미 서두에 운초 계연수가 1911년에 자신이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등을 필사, 합본해 엮은 것이라고 발문에 붙여놨다. 따라서 그 때 일부 지명이나 용어 등을 알기 쉽게 치환했을 수 있으며 그건 '가필'의 증거라 할 수는 있어도 '위작'의 증거라 보긴 어렵다.
만약 가필이 곧 위작이라면 사마천의 『사기』또한 위서라고 해야 한다. 『한서』《사마천전》에 실린 장안(張晏)의 주석에는 『사기』130권 중 10권이 이름만 전하고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으며 『사기』《조선열전》엔 그 당시 중국에서 쓰이지 않았던 관직명인 '졸정(卒正)'이란 벼슬이 나온다. 이는 명백히 후대의 가필 흔적이지만 사마천의 『사기』를 위서라 주장하는 학자는 본 적이 없다.
또한 『환단고기』를 위서라고 주장하는 근거 또한 지금까지 봤을 때는 내용에 대한 충분한 검토 끝에 나온 '본질적인 부분'이라기보다는 ‘자구(字句)의 사용례’에 매달리는 지엽적인 부분에 얽매이고 있다는 느낌을 감추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을 바로잡아줘야 할 언론인들이 제대로 이에 대해 공부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주류 강단사학자들의 일방적 주장에 편승해 한 쪽 말만 전하고 있으니 문제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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