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안에 들어와 산다는 것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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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안에 들어와 산다는 것이 힘들었다!

하이커뮤니티매니져 0 3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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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1월 16~17일, 제9기 기성전 도전7번기 1국이 서울 롯데호텔에서 두어졌다. 기성전(棋聖戰)은 일본 최대 기전일 뿐만 아니라 일본바둑 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여는 도전기였다. 힘겹게 이긴 기성 조치훈은 대국 후 상대방의 세력 안에 들어가서 살아남는 것이 힘들었다고 말했다.








특별인터뷰 |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④







‘형만한 아우 없다’는 속담은 적어도 바둑세계에서는 딱 들어맞지 않는다. 대체로 형보다는 동생이 더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예로 들면, 형 김수영보다 동생 김수장이, 형 안형준보다 동생 안성준의 성적이 돋보인다. 한국에서 대표적인 형제기사로 꼽히는 형제기사 이상훈보다 동생 이세돌의 업적이 훨씬 뛰어나다. 일본에 건너가 활약한 형 조상연과 동생 조치훈도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들 동생의 성장과정을 들여다보면 ‘형 없이 아우 없다’란 사실을 대면하게 된다. 일찍이 그런 형이 없었다면 이런 아우도 없었을 것이란 사실. 바둑영웅 조치훈 九단을 키운 건 8할이 형 조상연의 헌신 덕분이었다. 형 조상연 七단으로부터 조치훈의 어제와 오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사진은 한국기원 [월간바둑]과 일본기원 데이터 등에서 가져와 사용했음을 밝힙니다.







○●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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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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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 조상연에게 듣는 조치훈 九단의 바둑이야기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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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Epilogue) 편







지고도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1985년 조치훈후원회 회보(12월부터)에 연재한 조치훈 九단의 <그러므로, 이겨야 한다>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섯 살 때 일본으로 건너와서 24년. 입단하고 나서부터 따져 18년의 세월을 나는 바둑의 승부사로 살아왔습니다.철이 들었을 때는 이미 기사라는 운명의 레일이 깔려 있었으므로, 스스로 사는 꼴을 뒤돌아보는 일도 없이, 오로지 외곬으로 한판 한판에 전력을 투입해 왔습니다. (중략)




반상 19로의 소우주에 자신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어떤 수를 써서라도 승리를 쟁취하려는 것은, 기사의 업(業)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고된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철이 들기 이전에 바둑의 공기를 마시며 자랐으므로, 나는 기사가 되는 길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행복하다거나 불행하다거나 하기 이전에 바둑은 이미 나의 천직이었습니다.




‘지고도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라.’


승부에 임하는 나의 자세는 이 한마디 말에 나타나 있습니다. 지금은 그다지 자신을 엄격하게 내몰아 생각지 않습니다만, 11세 입단시 인생에서 처음으로 터득한 진리가 이것이었습니다. 아마 일생 동안 이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1. 안에 들어와 산다는 것이 힘들었다.





1985년 1월 16~17일, 제9기 기성전 도전7번기 1국이 서울 롯데호텔에서 양일간 두어졌다. 기성전(棋聖戰)은 일본 최대 기전일 뿐만 아니라 일본바둑 사상 최초로 해외에서 여는 도전기였다. 게다가 타이틀 보유자가 한국인 조치훈이었고 그의 고국에서 펼치는 서전이어서 대대적인 관심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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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5년 1월 서울 롯데호텔에서 둔 제9기 기성전 도전7번기 1국. 입회인 사카다 에이오 九단도 보인다.



당시 이 도전1국을 직접 관전하고 취재기를 쓴 일본 논픽션 작가 사와키 고타로(澤木耕太郞) 씨가 기성(棋聖) 조치훈이 장장 18시간의 사투 끝에, 93수부터 1분 초읽기에 몰리면서 흑 7집반 승을 거둔 대국결과를 보고서 ‘안에 들어와 산다는 것이 힘들었다’라는, 중의(重義)적인 표현을 썼다.




우리가 알다시피 도전자 다케미야 마사키 九단은 ‘우주류’로 불리는 거대한 세력바둑을 구사하는 기사다. ‘폭파전문가’란 별명이 붙기도 한 조치훈 기성의 실리 기풍과 극명하게 대비돼 이들의 승부는 매번 ‘사느냐 죽느냐’의 싸움이었다.






<장면> 제9기 기성(棋聖)전 도전7번기 1국



○ 도전자 다케미야 마사키(武宮正樹) 九단


● 기성(棋聖) 조치훈 九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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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국 역시 이 패턴을 벗어나지 않아, 깊숙한 백의 골짜기에 뛰어 들어간 흑이 악전고투 끝에 불사조처럼 살아가면서 끝났다.




<장면> 백1로 두었을 때 흑2·4로 이단젖힌 수가 백의 거대한 제방에 구멍을 내는, 유일한 빈틈을 찌른 강수였다. 백5의 절단은 당연한 수이고, 이걸로 흑10 이하 하변 백 세력 안에서 사느냐 죽느냐의 지난한 싸움이 됐다.




'안에 들어와 산다는 것이 힘들었다.'


대국 후 조치훈 기성이 다케미야 九단의 백 세력 안에 들어가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힘들었다고 한 소감을, 한국인이 일본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 어릴 적 일본에 와 일본에서 자란 사람이 장성해 다시 조국에서 산다는 것은 힘들다는 여러 의미를 내포한 멋진 표현으로 함축했던 것이다.




일본 도전7번기 역사상 여섯 번 펼쳐진 ‘3연패 후4연승’ 기록에서 조치훈 九단이 네 번이나(이 중 한번은 린하이펑 九단에게 당한 것이기는 하나) 주인공으로 등장한 까닭도 ‘어떻게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한 투혼’의 결과 아닐까. 3연패 후 4연승 기록을 두 번이나 쓴 린하이펑 九단 또한 대만인이라는 걸 그저 공교롭다고만 할 것인지.





#2. 라이벌 고바야시에게 경의를 표하게 됐다.





고바야시(小林光一) 九단은 조치훈보다 네 살 위지만 기타니도장에 2년 7개월 후에 들어온 후배다. 그렇지만 허리에 장난감 권총을 차고 뛰노는 개구쟁이 선배(조치훈)를 따라잡는 데는 반년밖에 걸리지 않았고 2년이 채 되지 않아 먼저 입단했다. 같은 방을 쓴 조치훈의 기억에 그는 ‘불쾌할 만큼 성실한 문하생’이었다. 훗날 일본바둑사에 남는 라이벌의 시작은 이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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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대미문의 휠체어대국. 제10기 기성전 도전7번기 2국에서 도전자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이 첫수를 착점하는 장면이다.




기성전 방어전을 열흘 가량 앞둔 1986년 1월 6일 자정 무렵, 조치훈 九단은 평소와 다름없이 바둑공부를 하다 밤참 생각이 나서 집밖에 나섰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처음 병원에서는 전치 3개월이라고 진단했으나 4시간에 걸친 수술을 끝낸 뒤에는 생각보다 심각하다며 전치 6개월 이상을 요하는 중상이라고 수정 발표했다. 두 다리는 골절됐고, 왼팔도 골절돼 깁스한 상황. 담당의사는 당연히 이 몸으로는 대국이 불가하다는 판정을 내렸고 주위에서도 도전기 첫판만큼은 부전패로 하자고 만류했지만 조치훈 九단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기성전 주최사인 요미우리 신문사가 마련한 특별기를 타고 온몸에 붕대를 감은 채 조치훈은 병원용 침대에 누워서 대국지인 도야마(富山)로 이동했고 1월 16일, 마침내 바둑사에 전무후무한 휠체어대국을 선보였다. 도전1국은 예상대로 조치훈 九단이 완패하고 말았다. 린하이펑 九단은 “7번기는 마라톤과 같은 것. 중상을 입은 몸으로는 견딜 수 없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만 조치훈 九단은 오른쪽 다리를 재수술 받은 뒤 나선 도전2국에서 마지막 초읽기에 몰리면서도 정확한 수순으로 도전자를 압도하며 완승을 거두었다. 초인적인 힘으로 게임 스코어 1:1을 만들자 가뜩이나 중환자를 상대로 부담스러워 하던 정상인(고바야시)이 당황하는 국면이 전개되었다.



맞수 고바야시는 85~86년 불과 반년 새에 조치훈에게서 명인, 기성을 앗아가 무관으로 떨어뜨린 장본인이다. 교통사고로 ‘휠체어 대국’을 펼치던 중(1:1 상황에서) 도전3국을 앞두고 고바야시 九단이 돌연 “의자 대국은 도무지 감을 못 잡겠다”며 자신은 다다미에 정좌해 둘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했다.




상대의 휠체어 높이에 맞춰 두기 위해 익숙하지 않은 의자 대국에 응했던 그였다. 이때 조치훈 九단은 속으로 무척 놀랐다. ‘부상자를 상대로 자기주장만 내세운다’는 비판이 쏟아질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이토록 솔직하다니, 이토록 강인한 투지라니! 일본경제신문에 연재한 ‘나의 이력서(私の履歷書)’란 칼럼에서 밝힌 속내다.




“내가 그 입장이었다면 도저히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으로 솔직한 사람, 그리고 대단한 승부근성이다. 이때 처음으로 고바야시 고이치에게 존경심을 품게 됐다. 기타니도장에서부터 오랜 세월 함께해 왔지만, 마음의 문을 연 것은 이 순간이 처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상대방이었던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마침 ‘사이버오로’ 김수광 기자가 지난 9월 중국 칭다오에서 열린 3회 백산수배 세계바둑시니어최강전에 일본대표로 출전한 그에게, 어느새 73세나 되어버린 그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 조치훈 9단은 ‘휠체어 대국’ 때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으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을 회고합니다. 3국이 끝나고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이 자신은 정좌(무릎 꿇는 자세)로 둘 수 있게 해달라고 주최측에 요청한 것을 보고선 그 솔직함과 승부근성에 대해 존경심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치훈 九단이 교통사고를 당해, 기성전 도전기 직전에 오토바이와 충돌했다고 하더군요. 다리를 심하게 다쳤죠.


조치훈 九단은 예전부터 역경에 처하면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사람이었어요. 역전승이 많은 기사이기도 합니다. 제가 1국에서 이겼지만 2국과 3국에선 완패했습니다. 조치훈 九단의 명국이라 할만한 내용으로 내가 완벽하게 졌어요. ‘이대로는 안 되겠다’ ‘속수무책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7번기 같은 큰 승부는 대체로 다다미방에서 서로 정좌를 하고 두는 게 관례였어요. 지금이야 의자에서 두는 대국이 많아졌지만 예전 일본에선 대부분 다다미에서 무릎을 꿇고 뒀거든요. 처음엔 사고를 당한 상대에게 맞춰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저도 의자에서 두었지만, 평소처럼 두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래서 주최측에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졌습니다. 상대에게 그로 인한 불편을 주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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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과 조치훈 九단은 일본바둑사에 남을 라이벌로 숱한 명승부를 펼쳤다.



훗날 일본바둑의 레전드가 된 두 소년은 기타니도장에서 같은 방을 쓴 룸메이트였다. 시작부터 여간한 인연이 아니었던 셈인데, 조치훈은 네 살 위(그러나 훗카이도에서 온 도장 후배인) 소년 고바야시를 ‘불쾌할 만큼 성실한 문하생’으로 기억하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같은 방을 쓰게 된 그 친구(고바야시 고이치)가 불쾌할 만큼 성실했다는 점이다. 아침에는 시키는 대로 꼼꼼하게 기보를 외웠고, 학교도 제대로 다녔다. 밤이 되어 내가 잠이 오면, 혼자만 불을 켜고 공부를 하곤 했다. 그 모습이 ‘성가신 녀석’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느낄 정도였으니, 나는 도무지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고, 실력도 그대로 제자리에 머물렀다. 연습바둑에서 지고 난 뒤, 그 분풀이로 실력이 약한 도장 누나들을 바둑판 위에서 괴롭히곤 했다.” (조치훈, ‘나의 이력서(私の履歷書)’에서)




도장에 입문했을 때 실력은, 고바야시가 입단할 즈음에도 조치훈이 백을 잡고 고바야시 이겼다고 한다. 그렇지만 허리에 장난감 권총을 차고 뛰노는 어린아이 같은 녀석에게 지고서, 승부욕이 불타 오른 고바야시는 반년 만에 말썽꾸러기를 따라잡았고, 입단은 고바야시가 1년 빨랐다.




이 점에 대해서도 김수광 기자는 짓궂게 물었다.






- 조치훈 九단은 고바야시 고이치 九단을 '놀라울 정도로 성실한 기사'라고 얘기합니다. 조치훈 九단을 어떤 기사라고 보십니까?






“세상에 조치훈 九단만큼 바둑에 몰두하는 사람은 드물다고 봅니다. 장난기도 있지만 누구보다 바둑에 진지하게 임하는 사람입니다. 지금도 공부를 멈추지 않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선 지금도 그만한 성적을 낼 수 없는 거죠.”




(소년시절부터) 조치훈은 바둑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었어요. 자세히 지켜보지 않았지만 그가 두는 바둑을 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어느 순간엔 완전히 확 바뀌어 바둑에 몰두하기 시작했고요. 15세 때쯤부터 무섭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입단 이후 성인이 되어서는) 조치훈 9단은 참 빨리 출세했지요. 저보다 먼저 명인이 되어버렸으니까요. 제가 오히려 초조했습니다. (나이로나, 입단으로나) 후배에게 추월당한 셈이라서요.”





#3. 조치훈의 연애와 결혼… 두 자녀





조치훈 9단은 1977년 11월 8일, 스물한 살 때 결혼했다. 그 시절 나이로 보더라도 조혼(早婚)이었다. 타국에서 큰형(조상연) 한 분만 의지해 살기에는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다. 조치훈은 늘 “일찍 결혼하길 참 잘했다”고 말했다. “일찍 결혼한 덕분에 술에 빠져 허송세월하지 않고 바둑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며 아내에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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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치훈 九단의 부인 소가와 교코(曾川京子) 씨. 1974년 만나 77년 11월 결혼했다. 그리고 2015년 췌장암으로 별세할 때까지 40여 년 희대의 승부사를 내조했다.




조치훈 九단은 '교코와 함께 있으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고, 편안했다. 그래서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결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승리로 패배로 늘 신경이 곤두서 있던 나를, 연상 아내가 마음 넓은 누나로서 따듯하게 다독여주고 보듬어주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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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접살림은 가나가와 현 가마쿠라 시에서 시작했지만 결혼 2년 뒤인 1977년 지바 현 기사라즈 시로 터전을 잡아 내처 살고 있다. 사진은 두번째 마련한 집에서의 단란한 한때.



아내 소가와 교코(曾川京子) 씨를 만난 건 1974년 가을이었다.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시(市) 출신인 교코 씨를 도쿄 기타니 미노루 선생댁에서 처음 봤다. 예법수련(예의범절수업)차 기타니 선생에게 서예를 배우는 등 한달 정도 머무르는 기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새 자연스레 가까워졌다고 한다.




여섯 살에 부모품을 떨어져 나온 십대 후반의 조치훈에게 여섯 살 연상의 여성은 안락과 안도를 느끼게 하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이 무렵 조치훈은 내제자는 프로 五단이 되면 독립하는 관례에 따라 기타니도장을 나와 혼자 살고 있었으나 수시로 들락거리며 바둑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고독한 영혼과 고독한 영혼의 만남이었다.”


예법수업을 마치고 교코 씨는 고향 홋카이도로 돌아갔고 둘은 전화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인연을 이어갔다.




조치훈은 TV속기전에서부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는데, TV도쿄에서 주최하는 신예 토너먼트 전에서 1972년 준우승을 했고 73년과 74년에는 연달아 우승을 차지했다.




교코 씨를 만난 그해 74년 12월, 일본기원 선수권전 도전자가 됐다.


타이틀 보유자는 54세의 사카다 에이오(坂田榮男) 九단. 서른여섯 살이나 어린 18세의 도전자가 처음으로 경험하는 도전5번기였지만 기세 좋게 1,2국을 연승해 타이틀 획득까지 단 1승만을 남겨두게 됐다. 한국에서도 난리가 났다.




한판을 내주었으나 도전4국(75년1월27일)은 20집은 앞서 있던 판이었다. 그런데 그걸 내주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조치훈은 그 바둑을 복기해 볼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는 판이라고 말한다.




“내 실수에 실망한 나는 곧장 돌을 거두고 기권했다. 그런데 더 큰 충격은, 그 시점에서도 내가 사실 이기고 있었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최소 접전을 펼쳐볼만한 국면이었다는 말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사실이) 너무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제대로 복기조차 해보지 못했다.”




이런 패배가 미칠 파장은 결과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아직은 승부사로서 여물지 않은 열여덟 청소년이다. 열흘 뒤 치른 도전5국까지 내주면서 2연승 후 3연패, 첫 본격 타이틀 획득 꿈은 이렇듯 허망하게 날려버렸다. 어찌나 충격이 컸던지 사카다 선배에 대한 공포증이 생겨 이 뒤로도 공식전에서 9연패를 당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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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것이 오히려 너한텐 도움이 된 거야.”



조치훈은 1974년 12월 24일 제22기 일본기원 선수권전 도전자로 나서 메이저 무대에 등판했다. 일본기원 선수권전은 이듬해에 관서기원 선수권전과 통합해 천원전으로 변모하는, 일본 7대 기전 중 하나로 거듭나는 그런 대회였다.




75년 2월 6일 2선승 후 2연패를 당한 처지에서 맞이한 최종 5국은 기세가 꺾인 젊은 도전자의 백 4집반 완패로 끝났다. 당시 월간『바둑』 관전기는 ‘한국의 기린아 조치훈의 시대는 봉오리 상태에서 일단 서리를 맞았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었다. 대국이 끝난 뒤 백전노장 사카다 九단은 10대의 후배에게 인상 깊은 한마디를 건넸다.


“진 것이 오히려 너한텐 도움이 된 거야.'



결과적으로 보면, 이때의 충격적인 패배가 역설적이게도 두 사람, 조치훈과 교코를 하나로 묶어준 기폭제가 됐다. 상실감에 젖은 치훈은 무작정 홋카이도로 날아갔고, 교코를 통해 아픔을 치유했다. 눈 쌓인 거리를 말없이 한 시간쯤 그냥 걷다가 돌아온 것뿐이었지만 큰 위로를 받았다. 결혼식은 가마쿠라에서 아주 가까운 지인들만 초대해 조촐하게 치렀다.




“아내는 나와 달리 성실하고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내가 바둑에서 지고 풀이 죽어 있으면 혼나곤 했다. 아내는 '당신이 이기든 지든, 나에게는 당신이 절대적인 명인이에요’라고 했다. 나에게 아내는 함께 있으면 마음이 아주 편안해지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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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녀 마도카(麻堵花)에게는 프로기사를 목표로 바둑을 직접 가르쳤으나 '재주는 있었으나 스승이기도했던 아빠가 딸에게 너무 엄격하게 대해 제대로 키워주지 못했던 모양'이라고 조치훈 九단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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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4년 9월 6일, 본인방 취위식에서 아내 교코(왼쪽), 딸 마도카, 아들 구라마와 함께.




아내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키기 위해 결승전을 기권한 남편





교코 씨는 2015년 8월 7일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1년여 투병하다 65세 이른 나이로 타계했다.




아내가 위독해진 그날, 운명의 장난이라고 해야 할까, 제24기 용성전 결승(상대는 관서기원 소속의 유키 사토시 九단)이 잡혀 있었다.




전치 3개월의 큰 교통사고를 당하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고바야시 九단과 휠체어 대국을 펼쳤던 조치훈이지만 그날만큼은 도쿄까지 가서 바둑을 두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두는 승부사에게 아내는 목숨보다 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지바현 도케에 있는 집에서 아내를 임종했고, 대국은 부전패 처리됐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로 조치훈 九단은 장녀 마도카(麻堵花)와 단둘이 살고 있다.




마도카 씨는 어릴 적 아빠처럼 프로기사를 목표로 바둑공부를 했지만 17세 때 포기하고 명문 게이오 대학에 진학했다. 아들 구라마(藏馬) 씨는 도쿄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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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해야 바둑, 하지만 바둑



하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바둑이 전부입니다. 바둑 이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회적으로는 잉여부분일지라도 나에겐 존재의 근거가 됩니다. 유아독존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나, 나에게 있어서 바둑은 위대한 세계입니다. 깊고, 매력적이며, 동시에 엄격한 세계로서 그 세계에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며, 이 축복은 많은 사람들의 이해 가운데서 생겼다는 것을 잘 압니다. … … 그러므로 상대방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멋진 바둑을 두어 이겨야 합니다. - <그러므로 이겨야 한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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